불행의 아이콘, 프리다 칼로: 고통 속에서 꽃 피운 예술 세계

 

불행의 아이콘, 프리다 칼로: 고통 속에서 꽃 피운 예술 세계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수 많은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신체적 고통과 감정을 솔직하게 화폭에 담아낸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입니다. 그녀는 강렬한 자화상과 멕시코 민속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나타낸 독특한 화풍으로 유명하며, 오늘날에는 여성주의와 자아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1. 프리다 칼로의 생애: 고통 속에서 꽃핀 예술 

1.1 유년기와 사고 

프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가늘어지는 장애를 겪었지만, 가족들의 사랑과 지지에 힘입어 밝고 영리한 유년을 보냈습니다. 일찍 상급 학교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기로 꿈꾸었지만, 그녀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1925년의 대형 교통사고였습니다. 

그녀가 18세 되던 해에 버스와 전차의 충돌 사고로 척추와 골반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이후 평생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학급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이동 중 트램과의 충돌로 부러진 쇠막대가 그녀의 골반과 허리 부위를 관통하는 비극이 벌어진 거예요. 

그로 인해 무려 서른다섯 번이 넘는 고통스러운 수술과 긴 병상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되고자 하는 꿈은 접어야 했고, 가족들의 권유로 그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면서 예술적 재능을 키워나갔습니다.

 1.2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1931>


1929년, 프리다는 멕시코 벽화의 대가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를 만나게 됩니다.  공공미술을 이끌어가고 민족 정체성과 사상에 대한 그의 사상과 신념에 매료되어 스물 한 살이라는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하게 됩니다. 디에고는 그녀의 당찬 성격과 예술적 재능을 높이 샀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디에고의 잦은 불륜과 반복되는 유산으로 인한 상처와 갈등으로 얼룩졌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너무 갖고 싶었지만, 끔찍한 교통사고는 엄마가 되고 싶은 그녀의 평범한 꿈마저 앗아갔습니다. 사고 충돌에 의한 부러진 철근이 그녀의 골반과 허리 부위를 관통하면서 자궁에 손상을 입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아기집이 안정적으로 착상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반복되는 디에고의 바람기는 멈출줄을 몰랐고 그녀를 고통속에 빠트렸습니다. 그는 급기야 프리다의 여동생과도 관계를 맺었고, 이 사건은 결국  프리다를 절망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여러 사람과 연애를 하기도 했지만, 이혼과 재결합을 반복하면서 디에고와의 끈질긴 인연을 이어갔으며, 결국 디에고 곁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훗날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디에고와의 결혼생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일생동안 나는 심각한 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하나는 내가 열여덟 살 때 나를 부서뜨린 전차이고, 두 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이다. 두 사고를 비교하자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2. 프리다의 작품 세계.

그녀는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디에고를 찾아가 자신의 그림을 평가 받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과 민족 정체성의 이념에 더욱 심취하게 됩니다. 이후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등 여러 혁명가들과 교류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멕시코 혁명 이후의 민족주의적 정서와 연결되었고, 멕시코 원주민의 아즈텍 문화를 강조하는 요소가 두드러집니다. 또한 당시 미술사적 주류인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녀의 화풍에 반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화풍이 초현실주의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하고 멕시코 화풍임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1938년 멕시코 여성 화가 최초로 브르통과 마르셀 뒤샹의 초청을 받아 파리 등 유럽에서 전시 활동을 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이후 뉴욕 등 유럽 여러 도시에서 작품을 선보이면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1)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 


프리다 칼로는 28년의 생애 동안 140여 점의 작품을 남겼고, 그 중 46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자화상은 주로 자신의 신체적 고통, 정신적 아픔, 여성으로서의 경험이 주된 주제입니다. 그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초현실주의적 기법과 멕시코 전통 요소를 융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자화상이 많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나는 자주 혼자였고, 내가 가장 잘 알 수 있는 주제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2) 대표 작품과 의미 


《가시 목걸이를 한 자화상》(1940) 
벌새가 달린 가시 목걸이를 하고 있는 자화상입니다. 목걸이에 돋힌 가시는 그녀의 살을 파고들어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그녀의 등 뒤에 등장하는 재규어는 수호의 동물로 그녀를 지켜주고, 원숭이는 유산으로 잃은 그녀의 아이를 대신합니다. 신체 및 정신적 고통 앞에 치유를 위한 그녀의 염원이 담긴 것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고대 멕시코인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벌새로 변신한 멕시토라 (Maxitorah)의 길 안내를 받아 이 땅에 왔다고 하는 전설을 믿고 있습니다. 벌새는 고대 아즈텍 문명에서 전쟁의 신이자 태양 신인 '우이칠로포치틀라(왼쪽의 파란 벌새)' 를 상징합니다. 또한 벌새는 강력한 힘과 에너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평소 멕시코 민족 정체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녀의 작품에는 이와 같은 상징적 기호들이 다수 포함 되어 있습니다.


<가시 목걸이를 한 자화상, 1940>



《부러진 기둥》(1944) 
 사고로 인해 부서진 척추를 기둥으로 표현했으며, 온몸에 박힌 못과 눈물 자국은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독을 상징합니다. 

무려 30회가 넘는 수술로 인한 고통을 표현하는 것으로 쇠막대로 척추를 상징하는 기둥과 몸 곳곳에 박혀있는 못이, 울지 않아도 절로 흐르는 듯한 눈물이 그녀의 수술로 인한 고통과 통증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갈 정도입니다. 


<부러진 기둥, 1944>



《두 명의 프리다》(1939) 
 디에고와의 이혼 직후 그린 작품으로, 한 프리다는 전통 멕시코 복장을, 다른 프리다는 유럽식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두 프리다는 심장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그녀의 정체성과 사랑의 상처를 나타냅니다. 멕시코 전통 복장의 프리다는 디에고의 프리다를, 유럽식 드레스의 프리다는 버림받은 프리다를 나타내며 디에고와의 결별의 아픔을 나타냅니다.


<두 명의 프리다, 1939>



《상처입은 사슴》(1946) 
 자신의 얼굴을 한 사슴이 몸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계속된 수술 실패와 고통에 대한 좌절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즈텍 문명에서 사슴은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고 이동성과 민첩성을 상징합니다. 프리다는 유년시절 오른쪽 다리 소아마비와 사고 후유증으로 오른 발이 괴사 되어가는 고통 속에 있다가 사망 직전 급기야 오른발 절단 수술을 하게 됩니다. 사슴의 몸을 가진 자신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홉 개의 화살이 박힌 채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슴은 자신의 신체적 고통과 지친 감정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상처입은 사슴, 1946>



《헨리 포드 병원》(1932) 
 유산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작품으로, 피 흘리는 자신과 태아, 골반 뼈 등이 붉은 선으로 연결된 모습이 고통과 상실감을 강조합니다. 

핏빛으로 물든 시트 위에 만삭의 자신이 유산으로 잃은 아기와 상징적 오브제들이 탯줄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유산의 슬픔과 감정들을 그녀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낸 민속 종교화의 첫 번째 레타블로 형식의 작품입니다.



<헨리포드 병원, 1932>



3. 활동 배경과 후대에 남긴 유산 


1)시대적 배경 

 1910~1920년 멕시코는 외세에 의존적인 기존 정권에 반발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신정권의 혁명으로 정치적으로 대변혁이 일었습니다. 멕시코 전통과 토착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민족 정체성에 대한 전반적인 움직임이 사회 전반에 걸쳐 일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에서도  공공 미술을 통한 민중 활동이 활발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녀의 작품에는 멕시코 원주민 예술과 신화, 민속 의상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멕시코 혁명 이후 국가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시대적 흐름과도 맞닿아 있으며, 그녀 자신도 멕시코 문화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2) 여성주의와 정체성 탐구 

그녀는 자신을 소재로 하는 자화상을 통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한 화가입니다. 불행의 아이콘으로 여겨질 만큼 불행의 연속 속에서 자신이 처한 불행과 고통을 주 소재로 인상적인 많은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의 몸과 정체성을 작품에서 적극적으로 탐구하였습니다. 그녀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고통과 억압, 성적 자유 등을 솔직하게 표현했으며, 이는 오늘날 여성주의 미술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4. 마지막 작품 비바 라 비다

프리다는 1954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색전증 이었으나, 그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수박 그림은 그녀의 병이 악화되고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1954년 죽기 직전에 그린 작품입니다. 그녀의 의연한 성격에서 드러나듯 삶의 막바지에 그렸다고 하기에 믿기지 않을 만큼 그림의 분위기는 회한이나 우울한 분위기는 읽히지 않습니다. 파란 하늘의 청량함과 단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빨간 속살이 밝고 경쾌해 보입니다. 

디에고와의 25년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여 디에고에게 선물한 마지막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중에 새겨 넣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바 라 비다(Viva ra vida)는 스페인어로 '인생이여 만세'를 의미합니다. 그 아래쪽 작은 글씨로 '다시 돌아오지 말기를' 그것은 아마 질곡의 삶을 뒤로하고 홀가분하게 떠나겠다는 메세지로 엿보입니다.




<비바 라 비다, 1953>


신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 의연하게 피워 낸 그녀의 예술은 멕시코의 중요한 문화 유산으로 남겨졌습니다. 또한 그녀가 남긴 일기와 편지들은 그녀의 고통과 열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그녀의 삶과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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